평범함이 빚어낸 위대한 궤적: 스크린 속 우주 비행사와 1987년의 거리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가 진행 중인 앤디 위어의 베스트셀러 ‘프로젝트 헤일 메리(Project Hail Mary)’는 원작과 비교해 꽤 흥미로운 각색을 거쳤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하는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우주선 헤일 메리호에 탑승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수정된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그는 장기간의 코마 상태를 견딜 수 있는 희귀 유전자를 지녔다는 이유로 발탁되는, 일종의 운명적 사명을 띤 인물이다.

반면 각본을 맡은 드루 고더드와 필 로드, 크리스토퍼 밀러 감독은 이 작위적인 설정을 과감히 덜어냈다. 대신 그레이스가 가진 고유한 지식, 그리고 훈련 중이던 동료 과학자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어 대체자를 구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절박한 상황 자체에 렌즈를 맞췄다. 돌아올 가족이 없는 고립된 개인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원작자 앤디 위어 역시 “소설을 쓸 때 억지로 만들어낸 듯한 과학적 설정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영화가 이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해 주어 기쁘다”며 찬사를 보냈다.

특별한 유전자나 하늘이 내린 사명이 아닌, 그저 주어진 비극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평범한 개인. 스크린 속 우주 비행사의 이러한 서사적 변화는 기이하게도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과 묘한 궤를 같이한다. 바로 1987년의 거리에서 세상을 바꿨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카메라 렌즈 밖, 전국을 뒤덮은 교복 입은 학생들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은 주로 서울 광화문과 남영동을 무대로 삼는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대전, 대구, 부산 등지의 집회 모습이 짧은 자료화면으로 스쳐 가지만, 실제 6월 항쟁은 안산, 포항, 인천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들불처럼 일어났다. 명동성당 농성에 이어 최루탄추방결의대회가 열렸고, 130만 명이 거리를 메운 국민평화대행진까지 그 열기는 실로 뜨거웠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거창한 이념으로 무장한 투사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구 경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한유미(49) 씨와 정은정(48) 씨는 이른바 ‘고운(고등학교 운동)’ 1세대다. 시문학 동아리 ‘가락’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전교조를 준비하던 배창환 교사의 영향으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강제 야간자율학습과 체벌에 반대하며 대구 지역 학생회장들과 ‘민주적 고등학교학생회’ 조직을 도모했다.

광주항쟁 영상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10대 소녀들은 국가 폭력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을 안고 반월당 집회 등 시위대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대학생 선배들이 최루탄 가스에 범벅이 된 이들의 눈 밑에 치약을 발라주거나 비닐로 눈을 가려주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투사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등하교를 하던 일상 속에서 우러나온 지극히 자연스러운 분노와 연대를 실천했을 뿐이다. 31년이 흐른 지금, 각각 전교조 대구지부 사무차장과 민주노총 대구지역 일반노조 정책국장으로 활동하는 두 사람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87년의 승리 기억이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넥타이 부대가 떠난 광장, 노동자의 땀과 외침으로 채워지다 영화 ‘1987’은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열린 7월 9일의 슬픔과 결의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역사의 톱니바퀴는 그 이후로도 쉴 새 없이 굴러갔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 선언의 정치적 성과를 뒤로하고 광장을 가득 메웠던 넥타이 부대가 직장으로 돌아갔을 때, 억눌렸던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에 남은 이들이 있었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이어진 사상 초유의 ‘노동자 대투쟁’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노동자들이 주도한 첫 대규모 투쟁이자, 경제적 민주화를 향한 절박한 외침이었다.

헤일 메리호에 홀로 남겨진 그레이스가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듯, 열악한 작업 환경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연대를 통해 생존을 개척했다. 당시 안양 대우전자부품 민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이었던 양규헌(66) 대표는 “7~9월 대투쟁은 6월 항쟁이 촉발했지만, 그 이면에는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 누적된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와 노동자들의 오랜 울분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성남 택시 노동자들의 월급제 요구 파업을 시작으로 울산, 마산, 창원을 거쳐 강원, 전라권까지 전국 단위로 확산된 이 투쟁에는 연인원 200만 명이 참여해 3341건의 파업을 기록했다. 그 결과 1986년 16.9%에 불과했던 노동조합 조직률은 1987년 10월 기준 23.1%까지 급증했다. 자본과 권력이 노동자를 포섭과 배제로 분열시키려 할 때마다, 현장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뜨거운 구호로 맞섰다.

결국 우주를 구한 한 남자의 서사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진 1987년의 역사는 동일한 진실을 증명한다. 세상을 구원하고 바꾸는 것은 작위적인 운명이나 소수의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등 돌리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기꺼이 치약을 바른 채 땀 흘리며 연대를 선택한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Releated

여풍(女風)이 휩쓴 북미 극장가와 진화한 공포의 귀환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파격적인 재해석이 돋보이는 영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 북미 박스오피스를 장악했다. 워너브라더스의 배급으로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첫 주말 3일 동안 3,480만 달러(한화 약 460억 원)의 티켓 판매고를 올리며 올해 최고 오프닝 기록을 갈아치웠다. 스튜디오 추산에 따르면 ‘프레지던트 데이’ 연휴인 월요일까지 포함할 경우 총수익은 4,000만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폭풍의 언덕’ 흥행 돌풍과 […]

성간 혜성 3I/ATLAS의 기원,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최근 과학계의 이목이 성간 혜성 3I/ATLAS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강력한 망원경을 통한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그 기원을 밝히기 위한 심도 깊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가이아(GAIA) 데이터, 혜성의 과거를 추적하다 스페인과 스웨덴 공동 연구팀은 혜성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유럽우주국(ESA)의 가이아(GAIA) 탐사선 데이터를 활용했습니다. 2013년에 발사되어 올해 1월 임무를 종료한 가이아는 우리 은하 내 수많은 별의 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