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를 지배하는 두 가지 방식: 165km의 ‘원석’과 52억의 ‘마당쇠’
현대 야구에서 투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는 꽤나 양극단으로 나뉘곤 한다. 한쪽에는 타자가 배트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구속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매 시즌 묵묵히 마운드에 올라 팀의 허리를 지탱하는 굳건한 내구성이 있다.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는 이 두 가지 가치가 최근 태평양 너머 마이너리그와 국내 스토브리그에서 각각 흥미로운 형태로 증명됐다.
타자를 위협하는 살벌한 열기, 양키스의 카를로스 라그란제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날 것 그대로의 스피드다. 뉴욕 양키스의 특급 유망주 카를로스 라그란제가 그 주인공이다. 14일(한국시간)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라그란제는 13일 PNC 필드에서 열린 트리플A 경기에 선발로 나서 시속 102.8마일(약 165.4km)이라는 끔찍한 광속구를 포수 미트에 꽂아 넣었다. 불과 몇 주 전인 4월 24일에 자신이 기록했던 최고 구속 102.6마일을 가뿐히 갈아치운 수치다.
이 구속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는 한미일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파이어볼러들과 비교해 보면 단번에 체감된다. KBO리그에서 160km의 벽을 허물며 화제를 모았던 안우진이나 문동주의 최고 기록을 훌쩍 넘어서며, 일본의 ‘레이와 괴물’ 사사키 로키가 남긴 NPB 역대 최고 구속(165km)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론 2010년 아롤디스 채프먼이 기네스북에 새겨 넣은 인류 역사상 최고 구속 170.3km(105.8마일)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2003년생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으로 키가 2미터를 가볍게 넘기는 이 거구의 투수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스카우트들의 군침을 돌게 한 전형적인 파워 피처다. 현재 MLB 파이프라인 전체 62위, 양키스 팀 내 2위 유망주로 랭크된 그는 종종 영점이 흔들리며 볼넷을 헌납하는 고질적인 제구 불안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 투박한 원석은 살벌한 구위로 타자들의 방망이를 헛돌게 하거나 땅볼을 솎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게다가 투구의 절반 가까이를 슬라이더로 채울 만큼 변화구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하다.
실제로 2026년 올해 트리플A 전체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공 상위 25개 중 13개가 라그란제의 손끝에서 나왔다. MLB.com이 “구속을 열기로 측정한다면 타자들이 화상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농담 섞인 극찬을 남긴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지에서는 그가 당장 올해 빅리그 로스터의 한 자리를 꿰찰 내부 옵션이 될 것이라며 콜업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계산이 서는 투수의 가치, 52억으로 남은 이영하
라그란제가 마운드 위에서 펼쳐질 아찔한 미래를 상징한다면, KBO리그에서는 철저히 ‘계산이 서는’ 베테랑의 현실적인 가치가 거액의 계약서로 증명됐다. 자유계약(FA) 시장에 나왔던 28세 이영하가 두산 베어스와 4년 최대 52억 원(계약금 23억, 연봉 총액 23억, 인센티브 6억 원)이라는 굵직한 조건에 도장을 찍으며 팀에 잔류한 것이다.
만약 라그란제처럼 165km를 펑펑 던지지 못한다고 해서 투수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어야 할까. 프로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016년 1차 지명으로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이영하는 통산 355경기에 나서 802⅓이닝을 먹어 치우며 60승 46패 9세이브 27홀드, 평균자책점 4.71이라는 성적표를 써 내려왔다. 특히 직전 2025시즌에는 무려 73경기에 등판해 4승 4패 14홀드, 평균자책점 4.05를 기록하며 불펜의 마당쇠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두산이 이영하에게 50억이 넘는 거액을 베팅한 진짜 이유는 구속이 아닌 ‘내구성’에 있다. 연평균 60이닝 이상을 너끈히 소화해 내는 체력은 긴 페넌트레이스를 치러야 하는 팀 입장에서 그 어떤 화려한 구종보다 절실한 무기다. 여기에 팀 내 젊은 투수들의 구심점이 되어줄 리더십에 대한 프런트의 기대치도 한몫했다.
새로 지휘봉을 잡은 김원형 감독과의 끈끈한 인연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영하는 김 감독이 두산 투수코치를 맡고 있던 2019년, 29경기에 등판해 17승 4패 평균자책점 3.64를 찍으며 개인 커리어 하이를 장식한 바 있다. 김 감독 역시 부임 직후부터 프런트에 내부 FA 이영하를 반드시 잡아달라고 콕 집어 요청했을 만큼 그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
계약을 마친 이영하는 “나를 그저 어린 투수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키워준 팀이 바로 두산이다. 계속 이 유니폼을 입게 돼 기쁘다”며 덤덤히 소감을 전했다. 이어 “사인하고 나니 어깨가 한층 무거워진 기분이다. 마운드 위에서 내 몫을 하는 건 당연하고, 후배들을 잘 이끄는 투수조장의 역할까지 제대로 해내겠다”며 베테랑다운 책임감을 내비쳤다.
타자의 전의를 꺾어버리는 165.4km의 비현실적인 패스트볼과, 어떤 상황에서든 묵묵히 마운드에 올라 팀의 계산을 성립시켜 주는 52억의 책임감. 결은 완전히 다르지만, 결국 야구라는 스포츠가 굴러가기 위해 마운드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두 가지 본질적인 가치를 두 선수의 행보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